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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역사를 만들다

예술, 역사를 만들다

2025.11.04 ~ 2025.11.25연강홀
  • 강사전원경
  • 안내예약 오픈, 추후 공지 예정

    일정. 2025.11.4 /11.11 /11.18 /11.25 (총 4회, 매주 화요일 오전 10:30~오후 12:00)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수강료. 무료

    * 회원가입 후 1인 1장 예약 가능, 선착순 마감
    * 1장 예약 시 4회차 강의 신청이 모두 완료됩니다.

DOOSAN ART SCHOOL
두산아트스쿨: 미술은 국내외 현대미술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운영하는 강좌입니다

 


35차 두산아트스쿨: 미술

 

 

예술, 역사를 만들다

역사가 예술을 만드는가, 뛰어난 예술이 역사의 발전을 견인하는가? 역사와 예술 사이의 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좁고 긴밀하다. 뛰어난 예술 작품들은 예외 없이 그 작품이 탄생하던 당시 시대의 요구와 목소리를 담고 있다. 총 네 번의 강의를 통해 예술이 역사의 변화를 통해 전환점을 맞거나 또는 예술의 발전이 역사의 변화를 반영했던 여러 사례를 살펴보고 이 와중에 탄생한 미술과 음악의 걸작들을 감상한다.

 

 

강의 개요

일정

시간

장소

강의명

11.4(화)

10:30~12:00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1강. 종교개혁: 분열된 유럽

11.11(화)

2강. 프랑스 대혁명: 예술, 반환점을 돌다

11.18(화)

3강. 산업혁명: 낭만에 빠진 파리의 보헤미안들

11.25(화)

4강. 벨 에포크: 1913, 위대한 마지막 1년

 

 

강의 내용


1강. 종교개혁: 분열된 유럽


교황청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과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면죄부 발매는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95개조 의견서 발표라는 저항 세력과 부딪쳤다. 미약해 보였던 이 최초의 갈등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고 결국 전 유럽은 한 세기 이상 이어진 종교개혁과 전쟁으로 끌려들어갔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예술에 대한 가톨릭 세력의 갈망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호화롭고 장엄한 교회를 짓겠다는 교황청의 욕망이 역사의 큰 변혁을 가져왔다. 종교개혁은 예술이 역사의 변화를 불러일으킨 가장 극적인 사례다. 또한 종교개혁은 단순히 신앙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유럽 각국은 저마다 경제, 정치적인 이유로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다. 이후 유럽은 한 세기 반 이상 구교와 신교로 나뉘어 맹렬한 갈등을 벌였으며 이 여파는 예술에 확연한 흔적을 남겼다.
1)    교황의 전횡과 개인에 대한 자각
2)    종교개혁이 시작되다
3)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불안이 낳은 예술
4)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예술의 탄생
5)    교회음악과 바흐의 역할

 


2강. 프랑스 대혁명: 예술, 반환점을 돌다


18세기 전반은 조용한 듯했지만 사실 물밑에서는 계몽주의를 받아들인 부유한 시민 계급. 즉 부르주아와 귀족 계급 사이의 갈등 양상이 점점 더 커져 나가고 있었다. 한 세기 가까이 이어진 이 갈등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커다란 화산이 되어 폭발했다. 혁명을 전후한 18세기의 예술 작품들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혁명 이전부터 부르주아에게는 예술 애호 취미가 있었다. 평등과 자유를 이념으로 한 혁명이 터진 후부터는 예술 역시 새로운 반환점을 돌아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독일 청년들의 정치적 패배주의, 나폴레옹에게 패전하고 열망하던 통일도 결국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엉뚱하게도 낭만주의라는 가장 비정치적인 장르를 낳았다. 이로 인해 낭만주의는 19세기 전반을 지배하는 사조로 떠오른다.
1)    미술을 통해 전파된 혁명의 이념
2)    나폴레옹은 자유의 화신이었을까?
3)    유럽, 전쟁의 물결에 휘말리다
4)    극적인 나폴레옹의 퇴장, 1815년 빈 회의
5)    낭만주의가 실연과 죽음을 동경하는 까닭

 

 

3강. 산업혁명: 낭만에 빠진 파리의 보헤미안들


산업혁명의 여파로 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번영했고 런던과 파리가 유럽 최대의 도시로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예술의 중심축은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서 프랑스 파리로 이동하게 된다. 여러 가지 정치, 문화적 요소가 이 변화를 부추겼다. 나폴레옹 1세 패퇴 이래로 프랑스는 엉뚱하게 다시 나폴레옹 3세의 집권으로 19년에 이르는 제2제정(1851-1870)을 맞았다. 파리의 분위기는 보불 전쟁(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코뮌(Paris Commune) 등 정치적 혼돈과 경제적인 호황 속에서 어수선하게 흘러갔다. 정치적 긴장과 갈등이 도시의 소비 풍조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마네(Edouard Manet)의 ‘올랭피아(Olympia)’와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의 ‘물랭 드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의 무도회’는 이 시기 파리 젊은이들이 빠져 있던 모순과 과도한 낭만성을 드러낸다. 두 그림은 ‘뛰어난 예술작품은 시대 정신의 모자이크’라는 말을 예술사학자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의 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1)    두번째 나폴레옹의 등장과 파리의 번영
2)    파리로 몰려온 처녀들
3)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그림에 담긴 빛과 그림자
4)    마네(Edouard Manet)와 드가(Edgar De Gas)의 냉정한 시선
5)    빅토리아 시대 신사들의 위선

 

 

4강. 벨 에포크(Belle Époque): 1913, 위대한 마지막 1년


21세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20세기를 ‘현대’라고 부른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산업과 예술의 변모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파격적이다. 특히 20세기 초는 확실히 새로움이 넘치던 시기였다. 정치적 안정과 과학 산업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 예술가들은 더 새롭고 더 혁신적인 경향을 강박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피카소(Pablo Picasso)의 압도적인 입체파를 시작으로 마티스(Henri Matisse), 클림트(Gustav Klimt),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말러(Gustav Mahler), 니진스키(Wacław Niżyński) 등 여기저기에서 천재들이 별처럼 빛났다. 그러나 이 즐거운 천재들의 시기는 10년을 채 가지 못했다. 천재들의 시간의 끄트머리였던 1913년은 훗날 ‘벨 에포크’라고 불리게 되는 이 빛나는 시기의 몰락을, 화려한 잔치의 마지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1)    영국의 팽창, 독일의 불안
2)    피카소(Pablo Picasso)와 브라크(Georges Braque), 그리고 마티스(Henri Matisse)
3)    젊은 예술가들이 본 독일의 앞날
4)    파리를 열광시킨 니진스키(Wacław Niżyński) 신드롬
5)    보수와 관능의 충돌, ‘살로메(Salome)’

 

 

 

강사 소개


전원경(예술 전문 작가·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시티대학교 런던(City University London)에서 예술비평 전공으로 석사를, 글라스고 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에서 문화컨텐츠산업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객석’과 ‘주간동아’ 기자로 일했으며 예술 3부작 시리즈인 『예술, 역사를 만들다』,『예술, 도시를 만나다』,『예술, 인간을 말하다』를 비롯해서 『페르메이르』, 『클림트』, 『런던 미술관 산책』 등 예술과 문화사에 관련된 11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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